산림이 우거진 절벽 끄트머리에 다다르어서야 걸음을 멈춘다. 휼은 눈에 띄는 바위 중 가장 너른 것을 골라 손으로 쓸어내려 자리를 만들었다. 보잘 것 없는 이 바위는 이제 임시옥좌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 위에 앉게 될 이가 임금이니. 경치가 좋구나. 휼의 곁으로, 도처에 말을 매고 나타난 이가 임금이었다. 주군 되시며 또한, "궐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구나...
무수한 걸음자국. 결코 뒤돌아보는 일은 없다. 날이 지났는지, 어떻게 지났는지. 계절이 변했는지, 내일이 겨울인지, 혹은 봄인지. 다 잊었으므로. 끓기 시작하는 조그마한 포트 위로 손 안에 쥔 부서진 꽃잎을 차례로 흘린다. 담겨있던 물의 색이 변하고 기묘한 향을 흘리니 이것이 망각차이다. 여는 찰랑거리는 차를 테이블 위로 내간다. 작은 도자기 찻잔도 함께였...
일요일. 정오가 조금 넘은 오후여서인지 카페 안이 시장 바닥처럼 복작였다. 삼삼오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자들이 서로 다른 화제들을 입에 올리기 바빴다. 딱 한 테이블의 혼자 앉은 사내를 제외하고. 주문하신 비엔나 커피 나왔습니다. 카운터로 부름 받은 사내가 커피를 가지고 돌아와 다시 앉는다. 그 사이, 주변의 모든 화제를 귀에 담았다. 대부분의 것들은 ...
시야는 온통 희뿌연 안개 뿐이다. 발밑으로는 진흙이 질척하다. 눈앞, 아지랑이처럼 일본식 목재 가옥이 너울거렸다. 다가가려하지만 여의치 않다. 진흙이 발모가지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덕분이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을 비트는 사이, 더 깊은 수렁으로 몸이 잠겨가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어디론가 빨려드는 것만 같다. 귓가에는 어린 짐승이 힘겹게 낑...
금위군으로 비보가 줄을 잇는다. 전각 앞 무관 차림으로 정제한 이들이 삽시간이 대열을 이루고 섰다. 한시가 바쁜 와중이다. 횃불을 높이 치켜든 자들이 앞을 밝히고 뒤로는 포졸들이 따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 칼을 찬 자의 발놀림이 가장 빨랐다. 불이 어둠을 가르기도 전, 도착한 무관은 급히 안으로 들어섰으나 한 발 늦은 셈이다. 장지문을 연달아 뚫은 사...
새빨갛게 부르튼 손을 내민다. 벨트를 풀라는 지시다. 이제는 명령을 듣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바지춤을 찾은 손이 무던히 떨어가며 벨트를 잡아챈다. '엄마'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다. 서른 명이 넘는 자식들이 매일같이 맞았고 그중에서도 크레덴스는 더 못한 대우를 받았다. '엄마'의 손에, 크레덴스가 내민 벨트가 들려졌다. 공중으로 높이 치켜든 손을 ...
뙤약볕 아래, 두 다리로 버티고 선다. 턱 아래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침식된 버섯바위나 고만고만한 모래 언덕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흡사 이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자신뿐이 아닐까 하는 최후의 생존자가 할 법한 생각도 해본다. 마실 물도 다 떨어져가는데, 오아시스라도 있으면 좀 좋아. 허리춤에 찬 물통에서 얼마 남지 ...
이를테면, 그건 구정물에 뛰어들기로 작정한 거나 마찬가지었다. 부딪는 몇 번의 눈길따위에 속내에선 검은 곰팡이가 피었다.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퍼진 그것이, 결국 그날 밤 그 문을 두드리게 했다. '교수 이재한'. 문 위에 달려있는 팻말을 새삼스레 올려다본다. 6년 전 처음, 이 문을 두드리던 때를 회상한다. 회색 후드티에, 편의점 커피 두 캔을 들었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외려 꼼꼼이 살피며 손끝을 재차 뻗는다. 이미 한 번 거부 당했다는 것조차 잊은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아도 그것은 키스 마크가 틀림없었다. 손으로 짚어본들, 그렇지 않은들 그 자국이 달라질 리 없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거세게 빨아들인 흔적. 피가 몰려 붉디 붉은 흔적. 그런데 어떻게 이게, 왜. 소리없이 눈짓으로 묻는다. 설명을...
'톱스타' 차영빈, 마약 투약 논란… "클럽서 엑스터시 들이켜" 대형특보가 터졌다. 문제는 남들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이 특보가, 자신에게는 머리 터지기 좋은 것이라는 점이다. 은갑은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고서 낮게 욕설을 뱉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빠진 손이 휴대폰 액정을 줄기차게 터치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차영빈은, 그 정도로 돼...
연성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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